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드레이 그레치코 (문단 편집) === [[냉전]] === 1945년 7월부터 그레치코는 키예프 군관구사령관을 맡았다. 이후 1953년 5월에는 [[서부군집단|독일 주둔 소련점령군집단사령관]]으로 부임했다. 부임 직후인 6월에 [[1953년 동독 봉기|동독 봉기]]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했고, 두 달 후인 8월에 [[대장(계급)|대장]]으로 진급했다. 1955년 3월에 [[원수(계급)|원수]]로 진급했고, 1957년 11월에는 [[소련 육군|지상군 총사령관]] 겸 제1국방차관이 되었다. 그리고 1958년에는 [[독소전쟁]]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. 1960년 4월에는 제1국방차관 직을 유지한 상태로 [[바르샤바 조약기구#s-3|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 합동군 총사령관]]을 맡았고, [[니키타 흐루쇼프|흐루쇼프]] 실각에 가담했다. 1967년 3월에 국방장관 [[로디온 말리놉스키]] 원수가 사망하자, 그레치코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. 국방장관에 임명된 뒤에는 [[레오니트 브레즈네프|브레즈네프 시기]]의 군비 강화 기조에 맞춰 [[소련군]]의 확장을 이끌었다. 그레치코의 국방장관 재임 시기에 소련군은 예비군의 동원 체계가 개선되었고, 현대화된 장비[* 그레치코는 제1국방차관을 역임할 당시 [[Mi-24]]의 도입을 지원했었다. 국방장관이 된 후에는 [[T-72]]를 도입했으며, [[대양해군]]의 지지자로서 [[키예프급 항공 중순양함]]의 건조를 지원했다.]와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, 소련의 각 지역과 해상에서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.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에 두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. 그리고 그 해, [[게오르기 주코프]] 이후 16년 만에 국방장관 신분으로 정치국에 입성했다. 그레치코는 [[프라하의 봄]] 당시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지했고, [[중국-소련 국경분쟁]] 당시에는 핵 공격을 지지했었다. 또한 [[방글라데시 독립전쟁|제3차 인도-파키스탄 전쟁]]과 [[제4차 중동전쟁|욤 키푸르 전쟁]] 당시에는 [[인도군]]과 [[이집트군]]을 지원했다. 그리고 제3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는 순간에 [[NATO]] 국가들에 대한 전면적인 핵 공격을 시작함으로서 핵무기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세계 대전의 1차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. 이러한 그레치코의 견해는 [[미국]]과의 전쟁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즉시 핵으로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련이 2차 공격 능력을 갖기를 원했던 군부와 정치 지도부의 반대를 받았다. 1976년 4월, 국방장관 재직 중 [[동맥]] 질환으로 인해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